[디펜스칼럼]백령도를 지켜야 하는 이유

최종수정 2023.06.19 10:35 기사입력 2023.06.16 10:30

'불침 항공모함' 백령도
군과 함께 주민들이 지켜
"섬에 살아주는 것이 애국"



백령도를 지키는 대표적인 부대는 해병대 6여단이다. 신미동(新美洞)에 있다. 정문 앞에는 조그마한 상가들도 있다. 이 상가들은 1·4후퇴 이후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문을 연 가게들이다.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이후 6여단이 정착했고 상가도 자리를 잡아갔다. 신미동 동쪽으로 가면 북포3리 나온다. 농지였던 이 마을은 해병대 6여단 군부대 아파트가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신미동 서쪽 방향에는 백령교회가 있다. 임마누엘교회라 부르는데 인근에 공적비가 있다. 공적비에는 리처드 지 스틸웰 UN군 사령관이 서해 5개 도서의 방어와 도서 주민들에게 베푼 봉사와 공헌을 기리는 글이 적혀 있다.


스틸웰 장군은 북한이 서해5도 도발을 집중한 1973년 8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서해5도 사수 작전에 나선 인물이다. 당시 북한 함정은 북방한계선을 200회 이상 침범했고, 1973년 7월 27일에는 백령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 4척이 우리 어선 1척을 격침했다. 우리 군은 공군 전투기와 해군 구축함까지 동원해 서해5도를 오가는 선박들을 엄호했다.


하지만 1974년 2월 15일. 백령도 근처 공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우리 홍어잡이 어선 1척(선원 12명)이 북한 고속정에 의해 격침됐다. 이어 어선 1척(선원 13명)도 납북됐다. 전쟁 역사를 품고 있는 백령도만큼 섬 주민들의 가슴속에도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새겨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신 당시 합창의장에게 대비책을 지시했다. 합참은 국산 기술로 개발한 105㎜ 곡사포는 물론 현역병에게만 지급했던 M1 소총을 백령도 예비군에게 보급했다. 백령도 주민들에게 위로도 아끼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백령도 주민들에게 "섬에 살아주는 것만이라도 애국"이라고 했다. 대만의 초대 총통을 지낸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타이완의 진먼섬(金門島)에 사는 주민에게 열사거민(烈士居民)’으로 경의를 표한 것과 같은 의미다.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문화공보부의 서해5도 위문공연은 해마다 이어졌고, 이효상 국회의장과 정일권 국무총리는 연이어 백령도를 방문했다. 백령도 학생들은 청와대에 초청받아 책가방을 선물로 받았다.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대응해 주민대피 시설과 몇 달 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도 비축됐다. 이 정책이 바로 오늘날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의 전신인 ‘서해5도서 지역주민 생활 안정 중기대책’이다.


하지만 최근 백령도 주민들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 서해 5도로 들어오는 여객선 항로에 해상풍력 발전사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국내외 업체들은 이 항로에 해상풍력 발전사업을 하겠다며 풍황계측기를 15곳에 설치했다. 백령도 주민들은 주변 대청·소청·대연평·소연평도 주민들과 함께 이동권을 침해받는다며 여객선 항로와 안전항로에 설치된 해상풍력 발전사업 관련 설비들을 모두 철거해 달라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청원했다. 백령도 주민들의 서운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북한이 지난달 31일 우주발사체를 발사하면서 섬 대피소로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대피소는 관리가 되지 않은 탓에 쓰레기가 방치되고 문이 잠겨 있었다. 주민들이 반발하자, 옹진군은 뒤늦게 섬 대피소 46곳의 내부 정비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백령도는 과거부터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 꼽히며 서해상 '불침(不沈) 항공모함’이라고 불렸다. 적이 점령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의미다. 백령도는 주민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주권과 정당성을 인정받는다.한의 서해5도 침공 시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만큼 "섬에 살아주는 것만이라도 애국"이라는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되새겨야 한다.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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