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군무기 부품은 ‘청계천 고물상’에서

최종수정 2020.04.25 12:00 기사입력 2020.04.25 12:00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기 설비 종합착공식에 참석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  (사진_포스코)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기 설비 종합착공식에 참석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 (사진_포스코)


[김민욱 월간 국방과 기술 편집장]▲청와대가 직접 지시한 번개사업= 1971년 11월 11일 "칼빈 소총 10정, M1 소총 2정, 경기관총 5정, 60밀리 박격포 4문, 3.5인치 로켓포 4문, 수류탄 300발, 대전차 지뢰 20발 등 주요 군수 장비를 4개월 내에 국산화 하라"는 긴급병기개발 지시가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에 전해졌다. 이른바 '번개사업'이다.


무기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기반과 기술축적이 전무하다시피 한데다, 총예산 970만원이라는 상황에서 단기간 내의 개발은 아무리 모방생산이라 해도 무모한 계획일 수밖에 없었다. 번개사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몇 차례의 건의와 방안수립, 수량 수정 등의 과정을 거쳐 최초지시 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1월 17일에 제1차 번개사업이 실행되었다.


1차 번개사업에는 당시 국내 과학계의 핵심 전문가들로 꼽히던 10여명이 부문별 책임자로 동원되었고, 개발방식으로는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TDP(Technical Data Package, 기술자료묶음)를 기초로 한국화하거나 견본장비를 획득하여 이를 역설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의 기술지도하에 방산업체가 시험제작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육군에서 쓰던 장비를 견본품으로 대여받아 분해하여 구성을 파악하고, 치수를 정밀측정 하는 작업이 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대부분의 장비가 신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한 치수를 산출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화기의 대부분이 국내 생산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구를 위한 자재를 구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엔 특수강 공장이 없던 때라 연구원들이 자재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던 곳은 시중의 철물상, 그 중에서도 주로 청계천의 고물상들이었다.


예산부족과 설비의 미비에도 불구하고, 국방과학연구소 담당부서는 물론이고 금성사를 비롯한 시제업체 및 국방부 담당부서 등 각 부처의 노력 끝에 두 달도 채 안된 그 해 12월 하순부터 시제장비의 시험사격이 실시되었다. 번개사업은 1972년 9월까지 제2차, 3차 사업으로 이어져 통신장비와 개인장구류 등의 품목까지 확대되었고, 모든 시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


4.2인치 박격포 시제품(1973년 5월) 4.2인치 박격포 시제품(1973년 5월)



▲국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중화학공업화 정책= 번개사업이 추진되고 M16 소총 생산 공장이 준공된 1972년 이후부터는 국내에서 기본화기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술적 기반과 생산시설의 완비에도 불구하고, 그 효율화에 있어서는 쉽게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정부는 그 원인을 초정밀 기술의 절대적 부족으로 진단하고, 중화학공업의 기반조성과 정밀기능사 양성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취지와 '산업구조 고도화'라는 경제개발목표가 맞물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선언'이 탄생했다.


중화학공업 계획에서 방위산업을 국가주도로 추진할 것인지, 민간주도로 추진할 것인지가 정부 각 부처 간의 논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관한 논쟁 가운데 "공기업 형태로 육성하면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를 경우 기업의 생존을 위해 자칫 전쟁 불가피론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방위산업은 민간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는 정책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체제로 자리 잡았다. "방위산업의 생산 활동은 민간 기업이 담당하되 생산체제의 정비를 통해 복수 기업으로 육성한다"는 기본원칙에 따라 무기 부품별로 82개의 생산 공장을 지정하고 생산시설의 효율적 활용을 위하여 평시에는 각 공장 생산능력의 80%는 민수용으로, 20%는 방산용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 1972년은 한국 방위산업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해였다. 1972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으로부터 방위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업체 및 산업의 보호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연구결과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결과를 토대로 1973년 2월, 기존 법령에 우선하는 특별법으로서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군수특조법’)이 공포되었다. 각 방산업체는 이 군수특조법의 제정으로 인해 방산시설의 설치 보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각종 세금 면제와 감면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방산업체에 종사하는 기술자와 기능사들 역시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업체 보호뿐만 아니라 인력 보호 차원에서도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방산물자지정제도도 군수특조법에 명시되면서 1973년에 도입되었다. 방산물자지정제도는 군이 필요로 하는 무기체계를 획득함에 있어서 개발을 수행한 업체에게 일정 기간(최소 5년) 양산 독점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이로써 정부는 품질이 보장된 제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기반을 확보·유지하고, 방위산업의 보호·육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이후 방위산업의 효과적인 육성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국방과학연구소와 민간연구기관 등이 주축이 되어 ‘방위산업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1976년까지 총포, 탄약 및 기본장비를 국산화하고, 19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의 정밀무기를 국산화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방위산업 10개년 계획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 전반기인 1971~1976년까지는 기반조성을 위한 단계로, 후반기인 1977~1981년까지는 기반완성 단계로 구분하였다. 기반조성 단계는 다시 두 단계로 나뉘어 1971~1973년을 기초 개발기, 1974~1976년을 라이선스 시제품 생산기로 구분하여 기본병기 개발과 생산 기반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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