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낙규의 Defence Club]김신조·푸에블로호 사건이 SCM 시발점

최종수정 2019.07.22 18:19 기사입력 2018.10.30 07:19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한미 안보협의회의(SCM)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SCM은 그동안 한미동맹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대표적인 연례 안보협의체로 평가된다.


한미가 SCM을 만든 것은 1ㆍ21 청와대 기습사건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사건이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1월2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청와대 기습사건을 벌인다. 국내는 이 일로 떠들석했다. 하지만 불과 이틀후인 1968년 1월23일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첩보수집 임무를 수행하던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게 납치된다. 승무원 83명이 북한에 억류됐다가 335일 만인 1968년 12월23일 풀려난다.


이 두 가지 사건을 놓고 한미간에 해법은 달랐다. 베트남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또 다른 전쟁을 우려했고 우리 정부는 강경한 대북조치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한미는 공조보다는 갈등상태에 빠지게 됐다. 결국 박전 대통령은 베트남에 파병을 보낸 우리군의 철수메세지를 미국에 보냈다. 이에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사이러스 밴스 특사를 한국에 보내 매년 한ㆍ미 국방각료회담(장관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 1968년 5월 미국 워싱턴에서 처음 개최된 이 회의가 현재의 SCM이다. 1971년 제4차 회의 때부터 양국 외교 대표도 참석하는 정부 차원의 안보회의체로 격상됐고, 명칭도 지금의 SCM으로 변경됐다.


한미가 SCM을 유지해온 50년동안 많은 역할도 주도했다. 우선, 지금의 한미 연합방위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7년 제10차 SCM에서 한미는 연합군사령부(이하 연합사) 창설을 결정했고 실제 이듬해 연합사가 창설됐다.1978년에는 연합사 창설과 함께 한미 합참의장 간 협의기구인 한미 군사위원회(MCM)도 설치됐다. 이로써 양국 통수권자의 지침을 SCM→ MCM→ 연합사 등을 통해 구현하는 연합방위체제가 구축됐다.


SCM은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능력 구축에도 기여해왔다. 1970년대 미국 정부의군수공장 건립 지원과 대외군사판매(FMS) 차관 제공 등은 한국군이 자주국방 역량을강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우리 군은 미국과 상호군수지원협정을 체결하고 방위산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군 장비를 현대화하고 방위산업을 발전시켰다.


SCM은 작전통제권 환수(전환)에서도 주요 정책 결정이 이뤄지는 계기가 됐다. 1994년 평시작전권의 환수가 이뤄졌다. 이후 2006년 제38차 SCM에서 양국 국방장관은"2009년 10월 15일~2012년 3월 15일에 전시작전권도 한국군으로 전환한다"고 합의했다. 이후 전작권 환수시기는 2012년 4월 7일로 정해졌으나 2010년에 한반도 안보 상황을 고려해 전작권 환수 시기가 2015년 말로 연기됐고, 2014년 제46차 SCM에서 한미가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 원칙에 합의하면서 사실상 무기한 연기됐다.


한편, 양국 국방부는 지난 26일 '제50차 SCM 개최 기념 한미 공동발표문'을 통해 "SCM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한반도의 안보를 보장해온 대체 불가능한 동맹협의체로 자리매김했다"고 밝혔다. 양국 의회에서도 SCM에 대한 지지 결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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