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에도시대 무사들은 왜 순순히 할복했나(上)

최종수정 2024.05.06 10:00 기사입력 2024.05.06 10:00

디즈니+ '쇼군'으로 보는 에도시대와 도쿠가와
무로마치시대엔 허용되지 않아…전국시대에 바뀌어
냉정한 감정·침착함 필요한 세련된 자살로 여겨
윗사람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지우기 위해 이용돼

디즈니+ 시리즈 '쇼군'은 1600년 전후 일본의 치열한 권력 싸움을 다룬다. 주인공 요시이 토라나가(사나다 히로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티브로 형상화한 배역이다. 사회적 유동성이 격심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천하를 통일해 새 시대를 열고자 한다.



당시 일본은 오닌의 난으로 막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했다. 천황, 공경, 사원, 신사라는 상부구조마저 붕괴해 기존 권위와 질서가 뿌리째 흔들렸다. 각지 영주와 무장들은 무력을 앞세워 영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처절한 생존경쟁이 계속돼 주군을 배신하거나 그 자리를 탈취하는 하극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일족의 생존을 꾀하거나 적을 도태시키기 위한 정략결혼도 유행했다.


이처럼 전국의 무장들은 자신의 힘으로 영지를 획득하는 데서 입신을 시작했다. 근원적으로 전쟁이 운명이었던 셈이다. 영지를 탈취한 무장들은 자기 땅을 지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더 신뢰할 수 있는 주군을 찾았으니, 그들이 바로 다이묘(많은 영지를 소유한 봉건 영주)다. 각지의 크고 작은 무장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성장을 거듭해 영지를 통일하고 중앙정권을 형성했다.


처음 권력을 손에 쥔 오다 노부나가는 파격적 발상으로 구시대 틀을 깬 천재적 혁명가였다. 그러나 하극상 문제를 소홀히 여겨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뒤이어 정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무가 정권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조선 침략에 실패해 단명을 초래했다.



최후의 승리자는 도쿠가와였다. 천재적 재능도, 시대적 운도 따르지 않았으나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해 위기를 벗어났다. 남이 견디지 않을 일들을 참고, 남이 하지 않을 일들을 인내로 일관해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미카와의 한 영주에 불과했던 그는 어떻게 다섯 지역을 영유하는 거대한 다이묘로 성장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 절묘하고 노련하며 치밀한 리더십을 조명한다. 더불어 '쇼군'에 자주 등장하는 할복이 빈번하게 발생한 원인과 에도시대 문화 등을 함께 알아본다.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시리즈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에도시대에는 죽을 만한 죄나 실수가 아닌 일로 처형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아키 히로시마 번주였던 아사노 나가고토는 식사와 관련한 일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간혹 음식물 안에 이물질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숨겼는데 큰 이물질은 그럴 수가 없어서 애를 먹었다. 한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쥐똥이 들어 있어 큰 소동이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면 담당자가 배를 갈라야 하기에 특별히 용서했다."


*할복은 '하라키리'라는 명칭으로 유럽에 알려졌다. 결정적 계기는 사아키 사건으로 전해진다. 1868년 2월 사카이 경비책임을 맡았던 도사번사가 프랑스 수병을 살해해 그중 열한 명이 프랑스 공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차례로 배를 갈랐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일본 남아의 기개를 보여준다고 여겼다. 유럽인들은 야만적인 풍습으로밖에 이해하지 않았다.



*할복은 무사가 죄를 보상하고, 잘못을 사죄하고, 수치를 면하고, 벗에게 속죄하거나 혹은 자기의 성실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무사들은 극도의 냉정한 감정과 태도의 침착함이 없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세련된 자살이라고 여겼다. 명예로운 자결 수단으로 생각했다. 무사에게 고용된 고용인과 농민, 초닌(상·공업자)들도 자결할 때 할복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 할복은 헤이안시대 대도로 유명한 하카마다레가 최초라고 전해진다. 밀고자로 인해 궁지에 몰리자 극단적 방법을 택했다. 무사들의 자결 방법으로 정착된 건 가마쿠라 시대 뒤로 추정된다. 말기 막부 멸망 시기에 많은 할복자들이 나왔다.


*오오쿠마 미요시는 무사의 할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무사도에서 제일 요구되는 것은 무용으로, 무용에 능한 것이 무사의 최고 자랑과 영예로 여겨졌다. (중략) 무용을 과시하는 것을 신조로 여기는 무사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가장 용감함과 기력이 필요한 할복을 선호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 있어 목을 매는 자살과 투신자살 등은 여자나 아이들이 하는 방법으로, 무사에게 있어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이었다." 용감함과 기력이 뒷받침돼야 해서 무사의 자결 수단으로 정착했다는 견해다. 전투에서 죽는 것이 명예였던 시절이었다. 전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동등한 죽음의 방법을 택해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했다고 할 수 있겠다.


*1739년 완성된 오카야마 번사 유아사 조오잔의 '상산기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가신 나루세 미사나리에 관한 흥미로운 대화가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에서 말을 점검하고 있을 때 건강한 흑마에 탄 무사가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도쿠가와는 "도쿠가와가의 무사 나루세 고키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도요토미는 거듭 물었다. "녹은 얼마인가?" "2000석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음, 나에게 봉사하면 5만 석을 지급할 텐데." 그 뒤 도쿠가와는 나루세를 불러 사정을 얘기하고 물었다. "히데요시에게 봉사하겠는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도요토미에게 봉사하면 너를 위해 좋을 것 같아 얘기하는 거다." 그러자 나루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불초의 몸으로서 녹을 받고 있는데, 주군을 버릴 수 있는 자로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건 어리석었습니다. 단지 하루라도 빨리 자결해서 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자결 방법이 할복이었다고 기록돼 있진 않다. 하지만 에도시대에는 무사가 자결한다고 하면 할복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일화에서는 자신의 진심을 주군에게 알리기 위해 배를 갈라 보이는 수밖에 없다는 관념이 엿보인다. 처벌로서 명령이 된 할복이 아닌, 결백의 증명이라는 의미가 존재한다. 역으로 죄가 명백한 경우에는 할복 따위를 시킬 필요가 없었다. 죄를 보상시키기 위해 그자의 목을 베면 그만이었다.


*중세사회에서 무사의 처벌은 참수였다. 저항이 예상되면 모살했다. 아무리 주종관계라도 할복 명령을 간단히 따를 리가 만무했다. 할복이 발상했다고 알려진 오오슈에서도 무사의 처벌은 참수였다. 1587년 다테 마사무네는 가신인 고야마 신스케를 참수에 처하고, 그의 처자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같은 해 가신 사이토오 야자에몬도 하인과 함께 참수형에 처했다. 아무리 무사라고 하더라도 죄가 있으면 용서받지 못했으며, 참수형을 피하려면 스스로 할복해 죽는 수밖에 없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신분이 높은 무사일지라도 에도시대처럼 차분하게 배를 가르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았다. 쫓겨서 하는 수 없이 배를 갈랐다. 그 형태가 바뀐 건 전국시대다. 성주들은 패배가 확실해지면 할복을 택해 가신들의 생명을 구했다. 빗츄 다카마츠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가 대표적 예다.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수공을 당하고 할복했다. 당시 무장들 사이에서 대장이 할복하면 가신은 살려준다는 관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투에서 패해 붙잡힌 무사는 참수형에 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도 참수형을 당했다. 무사로서 평가할 만한 점이 있는 경우에는 할복이 허용됐다. 예컨대 오다 노부나가는 상대가 적이지만 멋진 무사라고 생각하면 특례로서 할복을 허락했다. 이는 '총견기'에서도 확인된다.


아네가와 전투에서 오다 군은 아사쿠라 요시카게 군대를 격파하고 많은 수급(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을 취했다. 이들은 아사쿠라의 부장 가네마키 야로쿠자 에몬을 생포했다. 오다는 가네마키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이름이 알려진 용사이다. 어떻게 하다가 생포되었는가." "저는 여러 차례 적과 싸워 숨이 가쁘고 몸이 지쳐있었기 때문에 생포됐습니다." 오다는 정직한 답변에 감동했다. 투항해있던 아사쿠라의 가신 마에나미 구로베에를 통해 '살려줄 테니 우리 편이 되어 길을 안내하라'고 제안했다. 가네마키는 "주군 요시카게가 보는 앞에서 충의롭게 전사하지 못했습니다. 적에게 잡혀 목숨을 부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빨리 목을 쳐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마에나미가 목을 치려 하자 가네마키는 말했다. "무릇 사무라이가 적에게 생포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은 아니지만, 졸병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리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단지 본인이 원하는 바는 할복이다." 보고받은 오다는 "적이지만 지조가 있는 자이다. 포승줄을 풀고 배를 가르게 하라"고 했다. 검시관을 파견해 할복을 허용했다. 가네마키는 1573년 할복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할복은 에도시대에 무사를 사형시키는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무사 신분이 확립되면서 그들에 대한 처우로서 할복이 어울린다고 생각됐다.


*에도시대에 할복은 자결 수단뿐만 아니라 형벌로도 채용됐다. 엄밀히 따지면 후자는 드물었다. 형벌 때문이든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든 무사에게 할복이 정착된 건 에도시대 초기에 유행한 순사의 영향이 컸다. 죽은 주군을 뒤따라 자주적으로 자결했다. 이를 사료에선 '오이바라'라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1607년 사망했을 때 가신인 이나가키 쇼오겐과 이시카와 슈메는 순사했다. 타다요시로부터 추방돼 오오슈 마츠시마에 거주하던 오가사와라 겐모츠도 부음을 듣고 에도로 달려와 순사했다. 오가사와라의 동첩(나이 어린 첩) 삿사 키나이도 주인을 뒤따라 배를 갈랐다. 이처럼 순사자를 따라 순사하는 행위를 겹 순사(마타쥰시)라고 한다. 그해 이에야스의 차남 유우키 히데야스가 사망하자 가신인 츠치야 사마스케와 나가미 우에몬노 또한 순사했다. 나가미의 목을 친 다무라 킨베에도 주군을 위해 순사했다.


*다수 전문가는 순사를 애정의 맹세 행위로 본다. 넘쳐나는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몸에 상처를 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순사의 목적이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닌 자기와 자기를 총애한 주군과의 일체화에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순사자는 높게 평가받았으며, 한동안 유행하기까지 했다. 순사자 중에는 본래 순사할 만큼의 관계가 아닌데 유별나게 주군의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할복하는 자도 있었다.


*에도시대 전까지는 싸움에서 패해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모하게 할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순사가 유행하면서 할복은 평상시 무사들의 자결 수단으로 일반화됐다.


*에도성 내에서의 칼부림 사건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의 할복으로 일단락되곤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701년 아사노 다쿠미노카미나가노리가 고오케 최고참 기라 고오즈케노스케요시나카에게 상처를 입힌 일이다. 성안에서 칼을 빼서 달려들었다. 기라는 자상을 입었고, 아사노는 조사도 받지 않고 바로 할복을 명령받았다. 그로부터 1년 9개월 뒤 아사노의 부하 마흔일곱 명은 혼조 마츠자카초에 있는 기라의 저택을 야습해 기라의 목을 잘랐다. 츠나요시 장군을 비롯한 막부 수뇌부는 고심 끝에 센가쿠지로 퇴각한 이들에게 할복을 명령했다. 본래는 참수형이 당연했으나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한 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막부를 두려워하지 않아 벌인 소행으로 규정해버렸다. 무리 중 한 명인 오오이시 구라노스케는 항복을 명령받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답례했다.



*에도막부가 하타모토에게 할복을 명한 사례는 의외로 적었다.


*무사는 최하급일지라도 할복이 허용됐다. 그러나 죄상에 따라 드물게 나무 기둥에 묶어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참수형을 처한 사례도 있었다.


*무사 신분 이외의 자는 죽을죄를 지으면 참수형을 당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가벼운 죄라도 예외가 없었다. 아이즈번사 나츠메 이오리의 하인이 대표적인 예다. 주인이 업무상 횡령과 여색을 탐한 죄로 할복형을 당했는데 자기에게 피해가 있을 듯해 도망쳤다. 며칠 뒤 그는 자수했는데도 참수당했다.


*형벌로서 할복은 에도시대가 되면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무사 신분에 대한 배려에 가까웠다. 무로마치시대나 전국시대에는 특별한 무사에게만 할복이 허용됐다. 일반 무사가 범죄를 행하면 참수형에 처했다. 에도시대 무사들은 왜 할복을 명령받았을까. 이는 무사 기질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전국시대까지 무사는 할복을 명령받았다 하더라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도망가서 다른 주군을 섬길 수 있었고, 도망을 칠 수 없는 상황에서 저항하기도 했다. 단지 '할복을 명한다'고 말해서 끝나는 시대가 아니었던 셈이다. 만약에 할복한다고 하면, 배를 갈라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경우 이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에도막부가 성립되고 여러 번에서 번정(각 번이 재무, 행정의 재건을 위해 실시한 정치·경제적 개혁)을 확립한 뒤는 다르다. 무사들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조직 외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됐다. 가령 번에서 도망을 쳤다 하더라도 다른 번에서 받아줄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주군이 죽으라 하면 죽어야만 했다. 주군들은 무사 신분의 중요함을 배려해 할복을 허용했다. 처음에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며 할복을 강요했다. 항복을 명령함과 동시에 토벌군을 파견해 그 가신의 저택을 둘러싸는 일이 빈번했다. 가신이 할복하지 않으면 공격해 토벌했던 것. 결국 무사들은 주군이 배를 가르라 명하면 순순히 배를 갈랐다. 먼저 자기 죄를 깨달았다며 배를 갈라서 사죄하는 일도 생겼다. 그 정도로 할복은 무사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몽타누스 일본지'는 네덜란드 목사 몽타누스가 그리스도교 선교사나 네덜란드인 사절 등이 남긴 방대한 기록을 근거로 작성한 서적이다.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간행됐다. 그 뒤 독일어판, 영어판, 프랑스어판이 잇달아 출판돼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힌 일본 소개서가 됐다. 사실 몽타누스는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삽화에는 어느 나라 풍속인지 모를 정도로 이상한 것들이 많이 실려 있다. 할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됐다. "만약 스스로 처형하는 길을 택하면 그들은 복부를 가른다. 종종 놀랄만한 용기를 가지고 무서운 방법으로 배를 옆으로 가른다. 그들은 내장이 노출될 때, 즉시 자신을 베도록 머리를 숙인다. 보조인에게 목을 쳐달라고 한다. 그들은 이 보조인을 최상의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긴다."


*몽타누스는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 빌레아의 1557년 10월 서한을 인용해 할복을 거의 정확하게 소개했다. "왕이 이 처형을 어떤 사람에게 부과할 때 사자를 보내어 죽어야 할 날짜를 통고한다. 처벌받는 사람은 결코 도망가려고 하거나, 도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국왕의 명령에 따라 자결하는 것이 허용되기를 바라며, 그것이 허락됐을 때 더 없는 영예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지정한 시간에 다다르면 그는 최상의 예복을 차려입고 배를 가른다."


*할복을 둘러싼 중요한 관념은 가신의 목숨이 주군의 것이며, 주군이 죽으라고 하면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다. 주군에 대해서는 아무리 부조리한 명령이라도 복종하는 습성이 있었다. 에도시대 초기에는 주군과 정면으로 대립해서 전투도 마다하지 않는 무사가 많았다. 그러나 자립하는 무사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부터 무리하게라도 배를 가르게 하는 등 주군에게 저항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이렇게 주군은 가신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진 권력자로서 존재했다. 이 같은 주군 절대의 관념은 근세 무사도의 특징이다. 원래 무사의 인생은 '꼭 한 번은 주군을 위해 유용하게 쓰이기' 위한 존재였다. 무사는 주군의 필요에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서, 만약 그의 생명을 주군에게 바칠 수가 있다면 오히려 행운이라고 말해야 했다.



*무사는 주군을 위해서라면 배를 가르는 일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런 지시가 내려오면 친척, 친구도 배를 가르게 했다. 이를 '츠메바라'라고 한다. 저항이 예상되면 주군이 직접 살해를 명령하곤 했다. 이를 '죠오이우치'라고 한다.


*개별적인 무사의 할복은 번주를 정점으로 하는 사회를 지키기 위해 행해졌다. 죄나 불상사의 책임을 당사자의 할복으로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윗사람이 관리책임을 추궁당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근래가 되어서 이런 무사도는 군 조직에 이식됐다. 군대는 전략이나 전술 책임을 현장에 있는 병사나 사령관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노몬한 사건에서 현지 사령관에게 자결이 강요된 사례 등이 이를 명확히 드러낸다. 전전의 광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사도 정신'은 윗사람의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지우기 위해 이용된 것이다.


참고 자료 : 야마모토 히로후미 지음·이원우 번역·발행처 논형 '할복 : 일본인은 어떻게 책임지는가(2013)', 이길진 지음·발행처 동아일보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리더십(2004)', 구태훈·류희승 지음·발행처 히스토리메이커 '도쿠가와 시대 사람들(2017)', 도몬 후유지 지음·이정환 번역·발행처 경영정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간경영(2022)',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박선영 번역·발행처 21세기북스 '기다림의 칼(2010)', 미나모토 료엔 지음·박규태 번역·발행처 예문서원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2000)', 코스믹출판 지음·전경아 번역·야베 겐타로 감수·발행처 이다미디어 '일본 전국시대 130년 지정학(2022)',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조홍민 번역·발행처 글항아리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2017)'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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