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정부 부채 걱정할 필요 없다?

최종수정 2024.04.26 11:45 기사입력 2024.04.26 11:45

"정부, 화폐 독점·무제한 발행할 수 있어"
"금융위기 리먼브러더스 구제했어야" 주장
어쩌면 월가의 탐욕 반영된 건 아닐까…

흥미로우면서도 논쟁적인 주장들로 글이 시작된다. 서문에서 글쓴이는 돈과 관련된 여러 오해가 있다고 주장한다. 글쓴이가 오해라고 하는 주장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로 돈을 찍어냈다’, ‘정부의 국가 부채가 후손들에게 대물림된다’. ‘소득과 불평등이 시장경제의 부작용이다’, ‘암호화폐가 기존 법정화폐를 대체할 수 있다’ 등이다.


글쓴이 폴 시어드는 베어링 자산운용, 노무라 증권, 리먼브러더스 등에서 일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에서 근무 중이었다. 리먼브러더스 소멸 후에는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S&P)에서 근무했고 부회장의 지위까지 올랐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로 돈을 찍지 않았고 정부의 국가 부채가 후손들에게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시어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재정을 집행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시어드는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취했던 구로다 하루히코 전 일본은행(BOJ) 총재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하루히코 총재 재임 기간 취해진 BOJ의 정책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이라며 극찬했다.


같은 맥락에서 시어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정부가 막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산 당시 시어드는 리먼브러더스의 글로벌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다. 회사가 파산하면서 시어드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월가 은행가들이 보수를 많이 받는 만큼 동정받을 필요는 없지만 당시에는 어쨌든 리먼브러더스를 구제하는 것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사후적으로 드러난 바에 따르면 당시 Fed는 월가의 도덕적 해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리먼브러더스를 구제하지 않았다. 당시 재무부가 자금 지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Fed 입장에서는 구제할 방법이 없기도 했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기 6개월 전 또 다른 투자은행 베어스턴스는 Fed의 중재로 JP모건 체이스에 인수됐다. 당시 벤 버냉키 Fed 의장은 베어스턴스 때와 달리 리먼브러더스를 구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대출금 회수가 충분한 수준의 담보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시어드는 리먼이 베어스턴스보다 4배가량 규모가 컸다며 충분한 담보를 확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을 양껏 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와 Fed는 리먼브러더스를 구제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자에 따르면 시어드는 현대화폐이론(MMT·Modern Monetary Theory 혹은 Modern Money Theory)에 이론적 바탕을 두고 논거를 펼친다. MMT는 정부가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기 때문에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은 부도나지 않으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한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무한대로 돈을 발행해 소비와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시어드는 책에서 가계와 기업이 각각 소득과 수익 내에서만 돈을 쓸 수 있지만 정부는 이들과 달리 돈을 만들어내는 주체이기 때문에 적자예산을 운영해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MMT는 논리적 근거가 빈약하고 이론이라기보다 가설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책에서 확인되는 시어드의 주장도 논리적 근거가 빈약해 보인다는 인상을 준다.


시어드의 리먼브러더스 구제 주장은 MMT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이지만 시어드는 구제의 타당성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리먼브러더스를 구제했다면 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를 단언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그저 충격이 덜했거나 상당 부분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두루뭉술한 주장만 내놓는다.


소득 불평등에 대한 시어드의 인식도 다소 허술해 보인다.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소득의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다만 그는 파이를 키우면서 소득과 부의 재분배 정책을 취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일견 납득이 되면서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스스로 주장의 타당성을 떨어뜨리는 인상을 준다. 경제학자 로버트 고든을 인용해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여러 면에서 중세시대 왕족들보다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주장은 비판의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지 않는 한, 무제한으로 채권을 발행해도 상관없다는 주장의 경우 기존 주류 경제학의 통념과 상당히 달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한편으로 무제한 채권 발행 등 과격한 주장의 이면에 월가의 탐욕적 시선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싶어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시어드는 1995년부터 여러 투자은행에서 일했다. 또 금융위기 뒤에는 신용평가사에서도 일했다. 금융위기 당시 신용평가사는 세상 모든 것에 신용이라는 명목으로 등급을 매겨 수익화를 추구하는 탐욕적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신용평가사의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잘못된 등급 부여가 금융위기의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에 담긴 도발적인 주장들은 월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투영됐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돈의 권력 | 폴 시어드 지음 | 이정훈 옮김 | 다산북스 | 388쪽 | 2만5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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