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Next]명품이 높인 백화점 '격조'…아트리테일로 이어간다

최종수정 2024.04.27 09:00 기사입력 2024.04.27 09:00

쇼핑 공간 넘어 갤러리로 변신한 백화점
기존 명품으로 대변된 고급화 전략 한계
문화예술 콘텐츠로 상류층과 MZ 붙잡아

2000년 전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가 서울 한복판에서 재연됐다. 현대백화점이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맞아 마련한 이번 전시는 다음 달 6일까지 더현대 서울에서 진행된다.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한 조각상과 프레스코화, 장신구 등 폼페이 유물 127점을 만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찬란한 문화는 물론, 삶과 죽음의 의미까지 되짚어 보는 자리다.


백화점 업계가 '아트 리테일'에 힘을 쏟고 있다. 문화예술 콘텐츠를 강화해 백화점이 쇼핑 공간을 넘어 고객에게 예술적 경험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상류층 고객의 발길을 붙잡기 위한 고급화 전략이다. 값비싼 예술의 문턱을 낮춰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비롯한 신규 고객을 유치하는 효과도 있다.


현대백화점이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맞아 마련한 폼페이 전시회 내부. 이번 전시는 다음 달 6일까지 더현대 서울에서 진행된다. [사진제공=현대백화점]

미술관부터 오페라까지 예술로 채운 백화점

26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현대백화점은 오는 6월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14세기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총망라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세계 최대 규모 갤러리 '로빌런트 보에나(Robilant+Voena)'와 막판 조율을 진행 중이다. 2004년 런던에서 문을 연대 시작해 밀라노, 생모리츠, 파리, 뉴욕에 지점을 갖고 있는 세계적인 갤러리다.


로빌런트 보에나는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 아트페어 '프리즈'에서 17세기 걸작으로 꼽히는 안드레아 바카로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비롯해, 20억∼50억원대의 샤갈, 르누아르, 루치오 폰타나,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등의 작품을 내걸어 가장 주목을 받았다.


앞서 현대백화점은 지난 19일부터 28일까지 무역센터점 10층 문화홀에서 '대구국제아트페어(Diaf) 2024 프리뷰 인 서울'을 진행했다. 프리뷰 전시회에서는 국내 3대 아트 페어인 대구국제아트페어에서 전시될 국내외 갤러리 100곳의 작품 4000여점 가운데 100여점을 엄선해 먼저 선보였다.

더현대 서울 6층 복합문화공간 '알트원'에서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진행한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사진제공=현대백화점]

전시에서는 김종학, 김근태, 박서보, 이우환 등 국내를 대표하는 작가들과 아고스티노 보날루미, 쿠사마 야요이, 아야코 록카쿠 등 글로벌 작가들의 대표작이 전시됐다. MZ(밀레니얼+Z세대)세대에게 인기 있는 최형길, 조명학, 최울가, 김홍주 작가의 작품도 전시·판매됐다. 또 전문가가 상주하며 작품을 해설해주는 도슨트 서비스도 제공한다.


1985년 압구정 본점에서 문화홀을 선보인 현대백화점은 올해 캐치프레이즈를 '더 아트풀 현대'(The Artful HYUNDAI)'로 잡고 아트 리테일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문화예술 콘텐츠를 확대하는 것은 백화점을 예술이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고객의 일상에 영감을 불어넣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다. 브랜드와 상품 경쟁만으로는 차별화를 이룰 수 없다는 판단도 묻어 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전국 백화점에 국내에서 만나보기 어려웠던 예술 작품들을 지속 선보일 방침"이라며 "향후에도 다양한 아트테인먼트 콘텐츠를 통해 백화점을 찾는 고객들에게 깊이 있고 풍부한 예술적 경험과 영감, 그리고 힐링을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신세계·롯데도 매장 곳곳에 예술작품

신세계백화점은 올해 봄학기 문화예술 강좌를 지난해보다 20% 늘려 선보이기로 했다. 이 일환으로 강남점에서는 '음악과 미술로 만나는 유럽 - 유럽 박물관 미술관 투어', '알고 보면 재미있는 오페라' 등이 마련됐다. 다음 달 열리는 오페라 강좌에서는 성악가 한희정과 함께 베르디, 푸치니, 모차르트 등 세계적 음악가의 작품도 살펴볼 수 있다.


신세계아카데미 본점에서는 이달 '김혜은&장대건의 살롱콘서트'와 다음달 스파클링 와인 클래스가 준비 중이다. 또 센텀시티점에선 '해외미술관 여행-프랑스 오랑주리와 루이비통 미술관', '글렌피딕과 함께하는 위스키 콘서트',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주세피나 토레 공연' 등의 강좌가 열린다.


신세계백화점은 그동안 갤러리 등 큐레이션에 초점을 맞춰왔지만, 올해는 여기에 더해 문화예술 강좌까지 대폭 확대하고 있다. 문화 소통을 매개체로 고객과 접점을 늘린다는 전략인 것이다.


신세계가 문화예술 콘텐츠를 확대한 계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신세계는 1969년 국내 백화점 최초로 갤러리 공간을 선보였다. 이후 김환기, 피카소 등 다양한 국내외 유명 작가 전시와 크리스티, 소더비와 같은 세계적인 미술 경매 프리뷰 행사 등을 선보이며 경험을 확장했다. 정유경 총괄사장이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해 관련 분야에 조예가 깊다는 점도 신세계가 문화예술 콘텐츠를 강화하는 배경이 됐다.


롯데백화점도 지난달 본점 등 롯데갤러리아에서 '리조이스 특별전'을 열고 박영숙 도예가를 비롯 윤예진, 서승은, 문서민 작가 작품을 전시 중이다. 동탄점에서는 판다와 코알라 등 귀여운 동물을 소재로 가족애를 표현한 윤서희, 릴리 작가 작품을 공개하는 한편, 문화센터와 연계해 작가로부터 작품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아티스트 토크'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롯데백화점은 1979년 롯데갤러리를 개관하고, 2019년 아트콘텐츠실(당시 아트비즈니실)을 설치하는 등 문화예술 사업에 지속적인 투자를 해왔다. 롯데백화점은 전담 부서 설치 당시 미술 전문가를 임원으로 영입하며 아트 리테일에 힘을 줬다. 최근 아트콘텐츠실의 소속을 기획 부문에서 마케팅 부문으로 이동시키긴 했으나, 여전히 문화예술 콘텐츠에 공을 들이는 모양새다.


아트 리테일, 백화점 '격' 가른다

백화점 업계가 앞다퉈 문화예술 콘텐츠를 강화한 배경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통한 백화점의 프리미엄 전략이 한계에 직면하면서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은 세계 주요 도시에서 단독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백화점 입점을 통해 진출했다. 백화점 업계는 명품 브랜드를 유치해 고액 자산가들을 끌어 모았다. 이른바 '에루사(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등 고가의 명품 브랜드는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 입점할 백화점을 깐깐하게 골랐고, 이 때문에 백화점 업계는 럭셔리 브랜드 유치 경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온라인 명품 플랫폼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명품 제품의 판매 채널이 늘어나면서 명품 매장을 통한 '프리미엄 쇼핑 공간'이라는 백화점의 정체성에도 타격을 입게됐다. 백화점 업계 관계자는 "백화점 성장세가 둔화된 가운데 비슷한 대중화된 명품 브랜드를 유치하는 것만으로는 고객의 발길을 붙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장기적인 비전에서 문화예술 콘텐츠 강화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잠실점에서는 우리나라 달항아리를 알린 박영숙 도예가의 작품 100여점을 오는 21일까지 선보인다. [사진제공=롯데백화점]

백화점의 핵심 고객들이 문화예술 수요와 접점이 많다는 점도 아트리테일에 힘을 주는 배경이다. 백화점은 갤러리를 유치할 때 임대료 명목으로 입장권을 받아 VIP 고객들에게 나눠 준다. 일부러 미술관을 찾지 않고도 유명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 고객 반응이 좋다는 후문이다.


예술과 패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예술을 즐기는 MZ(밀레니얼+Z세대)가 늘어난 점도 한 몫을 했다. 이들에게 고급스럽고 트렌디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문화예술이 적합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실제 더현대 서울에 설치된 알트윈은 지난해 방문객 가운데 2030세대 비중이 71.3%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백화점 업계는 최근 10년간 성장이 정체됐다.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재화를 파는 곳'에서 '복합문화공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가중됐다. 이 때문에 백화점 업계의 아트리테일 행보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강화하는 것은 고객과 접점을 확대하고, 체류 시간을 늘리는 데 목적이 있다"며 "백화점에서 전시를 보고, 온 김에 쇼핑도 한다면 자연스럽게 매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동안 명품 매장 유치로 프리미엄 백화점 이미지를 구축했다면, 앞으로는 아트 리테일을 통해 백화점의 격이 달라질 것"이라고 전했다.



조성필 기자 gatozz@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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