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낙규의 Defence Club]JSA대대 실탄사격 훈련 직접 해보니

최종수정 2020.03.24 08:24 기사입력 2018.03.19 09:05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남북은 지난 6일 역사상 세 번째로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은 11년 만으로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는 것 자체가 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판문점은 남북의 군사적 긴장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1976년 8월에는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고 1984년 11월 소련인 마투조크가 판문점을 통해 망명하면서 총격전도 벌어졌다. 지난해 11월에는 북한 병사 한 명이 경기 파주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면서 관심을 받았다. 24시간 긴장감이 가득한 JSA 장병들을 만나기 위해 지난 7일 JSA대대를 찾았다.


자유로를 타고 도착한 통일대교 앞에는 언론사 취재진들과 경찰들로 가득했다. 이들 사이로 대형버스 1대가 남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평창동계패럴림픽에 참가하는 북한 선수단과 대표단 24명을 태운 버스였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이들을 등지고 거꾸로 북쪽으로 올라가니 느낌이 묘했다. 통일대교를 건너 10여분 차량으로 이동하니 JSA 대대 부대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부대 안에 들어서자 남북대화 분위기와 정반대로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330㎡규모의 리버티(Liberty)훈련장에는 중무장한 JSA대원들이 각자 총기에 실탄을 채우고 있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소총은 K5권총, K-3기관총, K14 등 다양했다. 판문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선글라스 낀 코던(Cordon)병력도 눈에 띄었다. 기자도 군복으로 환복을 하고 판문점에서 벌어 질 수 있는 상황을 부여한 훈련에 투입됐다. 환복은 쉽지 않았다. 군복을 입기 전에 방탄조끼를 입어야 했고 허벅지에는 권총 집과 교신을 위한 이어폰까지 착용했다. 어색했다.


코던병력들은 훈련장에 들어서 일렬로 대열을 갖췄다. 코던병력은 언제든 권총을 빠르게 뺄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한다. 영화나 뉴스에서만 보던 자세였다. 훈련이 시작되자 가상의 귀순자 한명이 훈련장 꼭대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코던병력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코던병력 2명은 귀순자를 유도해 바닥에 눕히고 경계했다.


나머지 병력들은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전방을 향해 실탄을 발사했다. 훈련장에는 자동화된 표적들이 무작위로 올라왔다. 표적들은 총에 맞아 쓰러졌지만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코던병력은 2인이 1조가 돼 사격을 실시했다. 앉아서 사격을 하는 병력이 탄창을 교환하는 사이 서 있는 병력이 사격을 이어갔다. 기자의 총구는 전방을 주시했지만 어디서 표적이 올라올지 몰라 허둥지둥이었다. 반면, 장병들이 쏜 총알은 표적을 정확히 명중했다.


임의진 대대장(중령)은 "판문점은 지역특성상 단시간에 모든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평소에 다양한 상황을 가정한 전투기술과 전술토의가 필수"라고 말했다.


표적들이 끝없이 올라오자 중무장한 지원병력들과 기동차량이 순식간에 등뒤에 나타났다. 기동차량에는 3명의 지원병력이 K-3 소총을 연사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코던병력들과 등뒤 벽쪽으로 이동했다. 이미 지원병력들은 K-2소총으로 전방을 향해 연이어 총을 발사했다. K-3 기관총 부사수임무를 부여받은 기자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K-3기관총에 빨려들어가는 총알을 받쳐들었지만 양쪽에서 쏟아내는 총 소리에 귀가 찢어지듯 아파왔다. K-3기관총 50여발이 발사될때 쯤엔 한쪽 귀를 막아야만 했지만 부질없었다.


조인현 중대장(대위)은 "공동경비구역은 규정상 권총만 휴대해야 하지만 JSA경비대대 장병들은 지원병력으로 투입될 수 있기 때문에 K-3기관총, K-4유탄발사기, K-6중기관총, PZF-III 등 모든 공용화기도 능숙하게 다룰 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코던병력과 지원병력이 쏜 총알만 3000여발. 훈련을 마치고 부대를 빠져나오는 길에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는 부대, JSA부대'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들이야 말로 실전같은 훈련, 국민이 믿고 안심할 수 있는 장병이라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을 안고 통일대교를 다시 건널 수 있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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