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방산의 전환기로- (4)방산기업 공장건설 첫 삽

최종수정 2022.09.26 15:54 기사입력 2020.05.16 15:00

1978년 9월 26일 안흥시험장에서 시험발사한 1호 국산미사일 백곰 (사진=국방과학연구소)


[김민욱 월간 국방과 기술 편집장]방산업체의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우선 1, 2차 국산화 시제 완료된 10여개 병기품목에 대하여 담당할 업체를 선정한 후 기존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여 장비를 생산하도록 하였으며, 지정된 방산업체에 대해 TDP(기술자료묶음) 등 제반 기술자료를 제공하여 개발, 생산토록하고 생산된 병기에 대해서는 성능시험을 거쳐 합격된 품목에 한해서 양산체제를 갖추도록 추진했다.


양산체제 구축을 위해서 계열별 병기생산의 선결 과제인 생산공장의 지정 및 건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평시의 탄약 수요충족과 전시에 대비한 비축을 감안하여 화약공장 건립이 우선 목표로 꼽혔고, 1974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화약공장 건설의 검토에 나섰다. 당시 이미 인천에 한국화약(주)이 소유한 민수용 화약공장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방위차원에서의 지역적 취약점을 감안하여 군용화약공장은 별도로 후방에 건설하게 되었다. 화약을 만들고 난 뒤의 부산물을 비료원료로 쓸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전남 여천에 제7비료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인접한 곳에 화약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미 기본소화기를 M16으로 교체한다는 방침이 굳어져 있었으나, 개인화기를 생산하는 신공장의 건설이나 지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현역군용 M16 소총과 M60 기관총은 이미 건설 중이던 M16공장에서 생산(육군 조병창 주도)하고, 현역군이 쓰고 있던 M1 소총, 칼빈총 및 기관총은 예비군에서 물려받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단, 예비군용 유탄발사기(M79), 박격포, 대전차 로켓은 민간 방산업체에서 생산하기로 결정되었고, 105밀리 포를 비롯한 대구경포 생산공장은 화포생산의 소재로 고급특수강이 필요했기 때문에 삼미특수강(주)이 맡게 되었다. 이 대구경포 생산 공장은 창원 기계공업기지에 세워졌으며 당시로서는 최신식 공장이었다.


이러한 계획 하에 개발생산업체 19개, 화포 시제업체 9개, 포탄 시제업체 19개, 기타 11개 업체 등 중복 제외 29개 업체가 제1차 방산업체로 지정되었다. 당시로서는 극비사항에 해당되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방위산업공장 건설계획은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에 일체 흡수 통합되었고, 건설자금도 중화학공업 건설 자금에서 지출하게 되었다.


▲ 1차 율곡사업=1974년에는 율곡사업 집행방침 및 절차를 대통령령으로 마련하여 율곡사업의 추진 절차를 규정화했다. 방위사업을 위한 재원마련을 위해 1974년과 1975년에 방위성금을 모았고, 방위세를 특별세로 신설하여 안정적인 무기체계 획득재원이 마련되었다.


1974년 4월부터 1981년까지 1차 율곡사업(전력증강 8개년 계획)에 착수하면서 양적 질적으로 열세한 대북 방위전력 확보와 북한보다 우위의 방위산업 육성을 목표로 했다. 중점 전력증강 분야는 조기경보와 방공능력 강화, 항공·해군 전력증강, 전투사단 개편과 후방경비사단 무장화, 지상화력 및 기동력 보강, 국방연구개발 및 방위산업 육성 등이었다. 이에 따라 국방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첨단정밀무기체계를 제외한 기본적인 재래식 무기체계를 생산할 수 있는 방위산업 기반은 1981년 무렵에 거의 조성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연구 인력을 확대하고 체계적인 연구개발에 전력하던 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78년 9월 26일 백곰 지대지미사일 발사에 성공하면서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사거리 180km를 자랑하던 백곰은 당시 북한이 갖고 있던 사거리 50km의 프러그 미사일에 비해 3배 이상의 사거리를 보유하고 있어 전 세계가 단기간에 상당한 발전 속도를 이룩한 한국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1979년 3월 5일에 한국군수산업진흥회에서 한국방위산업진흥회로 명칭을 바꾼 뒤 거행한 현판식



▲ 한국방위산업진흥회 설립= 방위산업은 그 특성상 업무체계가 다소 자유롭지 못하고, 어떤 사업보다도 정책적 제약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더구나 1975년 당시 방위산업육성정책은 산업의 토양을 착실히 닦고 그 위에 씨앗을 뿌리는 완만한 방식이 아닌, 황무지에 씨앗을 다져 넣는 듯한 다소 급한 방식이었다.


탄생배경이 이렇다 보니 정작 뒤에서 받쳐 줄 구조적 · 정책적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부족한 환경적 요인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은 결국 방산업체의 부담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특히 업체가 수익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는, ‘민수와 함께 발전’이라는 기본취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근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업체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 관계부처로서도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적절한 수익이 보장되고 업체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차후 방위산업 육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타 업체들의 방위산업에 대한 기피현상을 불러일으켜 양적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차후 육성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업체의 경영부담과 불만은 곧 생산력 저하와 시스템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적절한 해결책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구상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정부와 업체의 이해가 일치해 제안된 것이 바로 업체의 대변자 성격을 가진 협의기구의 설립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1975년 6월, 군수심의회에서는 본격적인 방위산업진흥을 위한 협의기구의 설치가 논의되었다. 군수심의회가 개선책 연구에서 의결까지 총괄하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국내외 정세와 제도 연구, 업체 지원 등 밀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육성업무를 효과적으로 완수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생산의 주체가 민간기업인 만큼 업체대상 업무지도 및 지원과 정부부처 대상 애로 및 건의사항 전달 등, 민과 군의 창구 역할을 수행할 협의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적극 동의한 방산업체 대표자들은 5개월에 걸친 논의와 준비 끝에 1976년 3월 5일, 한국군수산업진흥회를 발족했다.


한국군수산업진흥회는 회원사의 수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제도들의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제도개선에 우선점을 두고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이 무렵 1977년 6월부터 대통령 주재 방산진흥확대회의가 정기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방위산업에 관련된 민·관·군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방위산업 육성에 관한 원칙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들이 직접적으로 토론되었는데, 주로 방산자금 지원의 원활화, 육성기금 조성, 계약조건 개선 등의 주제가 거론되었다. 한국군수산업진흥회는 방산진흥확대회의를 통하여 현 계약제도상의 문제점, 자금지원의 난점 등과 개선책을 지속적으로 건의하였고, 정부 및 관계자들로부터 방산육성 지원의 보강 필요성에 대한 관심과 동의를 이끌어 내었다. 이 방산진흥확대회의를 통하여 “방산육성 지원 시책의 지속적 추진, 기능공 처우개선, 품질관리 및 검사제도의 확립”등이 대통령 지시로 하달되었고 이후 관련 기관의 적극적 협조를 통해 관세 감면대상의 확대, 원가계산 인정범위 확대 등 많은 성과가 이루어졌다. 방산진흥확대회의를 기점으로 정부와 방산업체의 업무가 점차 유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과 방위산업육성계획이 동시에 진행되던 상태에서 율곡사업까지 진행되면서, 1970년대 후반의 정국은 대규모 사업의 진행과 그에 비해 열악한 소득 수준이라는 난관에 부딪혀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방산업계가 당면한 기업수지개선 방안으로 방산물자의 수출촉진이 선결과제로 떠올랐다.


한국군수산업진흥회는 1977년부터 해외시장 개척활동 방안과 수출제도 개선을 위한 방안을 수립하고, 국방부와 연계하여 체계적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품질 향상도 중요하지만 이와 병행하여 시장의 정보, 각 국가별 수요물자와 공급 상태 등 수출 가능성에 기반한 조사와 회원사 대상 정보 전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 하에 해외시장 정보를 입수하여 수출가능품목을 작성, 시달하였다. 또한 해외기술교류를 위해 전시회를 비롯한 해외 방위산업 관련 행사 소식들을 수집하여, 각 정보와 분석내용을 회원사에 제공하고, 해외협력부를 신설해 본격적으로 해외협력사업을 전개하게 되었다.


해외협력 사업의 적극적 추진과 함께, 이사회에서 기존 영문 표기의 적합성이 제기되었다. 논의 결과 한국군수산업진흥회의 업무 성격을 알리는데 있어 적절하지 않으므로 영문 명칭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1978년 이사회 회의를 거쳐 1979년 3월 5일 현재의 명칭인 한국방위산업진흥회로 변경되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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