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방산의 전환기로- (2)과학기술연구소 설치

최종수정 2020.04.18 07:00 기사입력 2020.04.18 07:00

육군박물관에 소장중인 '대한식 소총' 7호. 1950년대 자주국방 노력의 상징 격이다. 육군박물관에 소장중인 '대한식 소총' 7호. 1950년대 자주국방 노력의 상징 격이다.


[김민욱 월간 국방과 기술 편집장]1970년부터 본격적인 시동을 건 한국 방위산업은 올해 방산 50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를 맞았다. 사람 나이로 치면 50세는 공자가 쉰의 나이에 하늘의 명을 알았다고 한 데서 연유해 '지천명'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 만큼 우리 방위산업은 50년 동안 비약적이고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관련 산업계의 기술발전을 이끌어 왔다. 사업 구조면에서도 초기 OEM 생산방식 위주에서 벗어나 기술 국산화는 물론 해외 수출까지 사업영역을 다양화하고 확장해 왔다.


지난 50년간 눈부신 성장과 기술적 발전은 방위산업 진흥을 위해 노력해 온 수많은 관계자들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우리 방위산업은 힘겹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북한과의 대립, 세계열강들의 이해관계로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치학적인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들이 일련의 문제들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도전과 변화를 요구받았다.


2016년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포럼에서 언급한 디지털 혁명을 기반한 초연결 ㆍ 초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전 인류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AI가 탑재된 로봇, 총알 없이 발사되는 레이저의 시대, 극초음속 미사일, 하늘ㆍ땅ㆍ바다에서 활약하고 있는 무인 스텔스 무기체계들을 더 이상 상상의 분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생각과 철학, 이념은 물론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거대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는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미 시작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이를 반대하거나 거부한다고 되돌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순응하고, 적응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50년을 위해 지금까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애써 온 노력들을 다시 돌아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구체적 실행 방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방위산업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 방산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사항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 국방 연구개발의 효시, '과학기술연구소' 설치= 1949년 12월, 국방부에 병기생산의 운영과 관리를 전담하는 '병기행정본부'가 설치되면서 '육군병기공창'은 병기행정본부의 예하로 흡수되었다. 당시까지 '육군병기공창'의 주된 수행업무는 일제 구식화기의 정비재생과 탄약의 생산 등 주로 기존장비의 생산과 정비에 치우쳐 있었다. 기술 인력과 기자재 등의 부족도 그 원인이었지만, 기술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 기술의 연구를 위한 전문적인 기관이 없었다는 것 또한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병기행정본부'는 육군병기공창을 1, 2조병창으로 나누는 동시에, 서울의 삼화정공주식회사를 제3공장으로 지정하고 인천의 조선알미늄공업주식회사와 기호전업주식회사를 생산 감독공장으로 각각 지정하여 병기생산능력을 확충하였고, 각 공장을 전문화ㆍ계열화하였다. 제1공장에서는 총포의 수리 정비, 제2공장에서는 각종 탄피생산과 권총제작연구, 제3공장은 정밀기계연구에 착수했고, 2곳의 감독공장에서는 주로 99식 소총 탄피와 탄환을 생산했다.


더불어 미비한 기술개발을 위하여 '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개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개발을 위한 노력이 채 빛을 보기도 전에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였고, 최초의 방위산업은 시작부터 휘청거리게 되었다.


1952년 연구개발을 위한 기관 전문화와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국방부는 다시 1, 2조병창을 '국방부 조병창'으로, '과학기술연구소'를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로 재편하였고, 조병 중견 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기술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특히, 6ㆍ25전쟁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1952년 10월 11일 '대한식 소총' 시제품 6정에 대한 시범 사격회를 실시하였다. 이는 1950년대 기술ㆍ자본의 뒷받침 없이 절박함으로 기적을 창출한 것이며 자주국방 노력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1953년에 병기 탄약에 대한 제조기술의 해결과 최신 제조 연구시설 도입 등을 추진한 결과 1953년에는 6ㆍ25전쟁의 휴전과 함께 연구제조기기를 목표량의 90%까지 도입, 확보하게 되어 연구개발에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60년 1월 15일에는 군수사령부의 전신인 군수기지사령부가 부산시 양정동에서 창설되었다. 6ㆍ25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우리 군의 독자적인 군수부대 창설과 지원능력 구비는 중요한 과제였기에 '한국군 독자적인 군수지원'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각 병과 군수부대를 지휘 ㆍ 감독하고 군수품의 부정유출 방지와 전군 군수지원을 촉진하는 데 힘썼다.


닉슨 독트린은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발표한 외교정책으로 아시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정책기조로 동아시아 동맹국들에 대한 중대한 안보정책의 변화를 야기시켰고, 한반도 안보에도 중대한 정책전환의 신호탄이 되었다. 닉슨 독트린은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발표한 외교정책으로 아시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정책기조로 동아시아 동맹국들에 대한 중대한 안보정책의 변화를 야기시켰고, 한반도 안보에도 중대한 정책전환의 신호탄이 되었다.



▲ 1970년대 : 닉슨 독트린 선언과 한미 군사동맹 관계의 변화= 한미 군사동맹관계의 변화를 가속화시킨 도화선은 1969년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 선언이었다. "강대국의 핵무기 위협을 제외한 내란ㆍ침략에는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대처해야 한다. 미국은 직접적ㆍ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요약되는 이 선언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의 한국 방위 의지에 대해 강한 불안을 품게 만들었다. 1970년 7월 6일 공식적인 주한미군 철수 결정이 통보되면서, 이러한 불안은 점차 현실로 드러났다.


닉슨 독트린 선언에서부터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 철수로 이어지는 미국의 태도 변화는 상대적으로 우리 정부에게 방위산업 기반 조성이 시급함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1월 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방위산업의 필요성과 방위산업 육성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였고, 병기에서부터 탄약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장비를 자급자족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정부는 방산육성방안에 대한 연구 결과, 경제개발과 방위산업육성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있어 양쪽의 발전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상승효과를 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민수산업의 육성보완을 통한 방위산업 기반구축이라는 전략적 입장을 밝혔다. 그 방안으로 정부가 주도하고 민간기업이 수행한다는 기본계획을 수립하였고, 정부 요인으로 구성된 한국경제공업위원회와 민간연구원 중심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고 기술 측면에서 지원했다. 또한 민간조직인 자동차공업협회에 장비생산 지시를 내리면서, 최초로 민간기업 참여에 의한 방위산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국방 연구개발의 본산인 '국방과학연구소'는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같은 연구기관이 국방분야에서도 필요하다는 검토 지시가 1970년 4월 27일날 있었고, 그에 따라 1970년 7월 국방과학연구소법에 따라 국방에 필요한 병기 장비 및 물자의 조사 연구 개발 시험 등을 담당하는 연구기관인 국방과학연구소를 1970년 8월 6일에 창설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1968년의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원칙적 합의를 보았던 M16 소총 생산공장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이 생산공장은 1971년에 착공하여 1972년 12월에 준공되었고, 1973년부터 양산체제에 들어갔다.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와 함께 미군 군사장비가 이양되면서 어느 정도 전력이 대체ㆍ보강된 것처럼 보였지만, 상당수가 이미 노후된 것들이었다. 그 중에 성능이 좋은 장비는 미군이 선별하여 가지고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남겨진 것은 제 성능을 내지 못하거나 주요부품이 훼손된 경우가 많았다. 부품을 교체ㆍ정비하려 해도 국내에는 생산기술이 없었고, 미국에서는 생산중단으로 공급이 끊긴 상태라 불량상태로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당시 주종화기였던 M1 소총은 본래 반자동식임에도 불구하고 가용화기 중 절반가량이 단발사격 외에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양도 많지 않았다. 1968년에 대공비 작전을 주목적으로 설치된 향토예비군의 경우, 병력은 20개 사단이지만 장비는 2개 사단분 밖에 없었다. 10명중 9명이 비무장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군수 무상원조마저 대외군사판매(FMS : Foreign Military Sales)의 차관형태로 전환되면서, 방산물자 자체생산 체제의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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