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방어전의 신화-(2)약점을 깨닫다

최종수정 2022.09.26 15:58 기사입력 2020.03.28 06:00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어떻게 생각한다면 1.4후퇴 직후는 서로가 상대를 제대로 몰라 과대평가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야간 산악전 위주로 고도의 심리전을 병행한 중공군의 낯선 전술에 속수무책 당한 아군은 필요이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평양 포기 후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무턱대고 도망만 다닌 셈이었다. 그래서 중공군이 다시 눈앞에 보이면 37도선도 미련 없이 포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38선 이북에서 미군이 신속히 후퇴하고 서울마저도 미련 없이 포기하자 정작 중공군은 한강을 건넌 후 오히려 주춤했다. 공세종말점을 지나쳤을 만큼 중공군은 참전이후 제대로 된 보급이 이뤄지지 않아 더 이상 남진하기 곤란할 만큼 힘에 부치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미군의 화력이 강함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하고 있었다.


서울 점령 후 중앙청 앞에서 여흥을 즐기는 공산군 선전 사진. 보급이 바닥나 더 이상 전진하기 힘들었지만 만일 이때 한 번 더 공세를 가했다면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다.



중공군은 주도권을 잡고는 있었지만 미군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12월 흥남철수 당시에 유엔군을 흥남 일대에 포위하여 놓고도 탄막에 가로막혀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악몽만 기억했다. 총사령관 펑떠화이(彭德懷)는 서울 점령 후 중공군이 기동 불가한 상황이었지만 그냥 쫓아내려가 얼굴만 보여주면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몰랐었다.


바로 그런 순간에 벌어진 울프하운드 작전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얻게 만들었다. 참전 이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아군을 밀어붙이던 중공군의 전술이 알고 보니 신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낯선 것뿐이었고 더불어 보급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즉, 중공군이 강해서가 아니라 몰라서 패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곧바로 효과를 발휘했고 1월말이 되었을 때 유엔군은 지쳐있던 중공군을 야금야금 격파하고 전선을 다시 한강 부근까지 밀어 올릴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러자 한반도 포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던 워싱턴 당국도 상황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대한민국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만일 리지웨이가 워싱턴의 의지를 알았다면 울프하운드 작전을 입안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이처럼 정초에 서울을 내주고 가장 춥고 암울하게 시작된 1951년 1월이 정신없이 지나가자 아군은 조금씩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지휘부의 이러한 자신감이 일선의 말단 병사들까지 골고루 퍼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직까지도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중공군의 피리, 꽹과리 소리는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고 북한 땅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악몽이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은 심야에 험로를 이용한 공격 능력이 탁월했고 더해서 심리전에 능했다. 중공군 참전 초기에 아군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이런 방식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울프하운드 작전은 반전의 기회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지난해 9월에 있었던 인천상륙처럼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켜 아군이 다시 38선을 너머 북진에 오르도록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울을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도 아군이 열세였다. 다만 유엔군은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리지웨이는 이 기세를 더욱 증폭 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대공세까지는 아니어도 전장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가시적인 승리가 요구되었다. 리지웨이는 피아모두 자연 경계선인 한강을 넘지 않고 대치하는 서부전선보다 돌파구 형성이 보다 용이한 중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전선 중앙부인 홍천 일대에 집결한 중공군을 섬멸한다면 아군의 사기를 앙양하고 더불어 서울 탈환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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