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펜스클럽]브란트 전 독일 총리의 무릎 사과

최종수정 2023.04.13 16:50 기사입력 2023.03.31 08:01

한일 관계 '용서' 변곡점
韓日, 안보협력 전제조건은 진심 담긴 사과



'용서'는 그리스어로 ‘아페시스’(aphesis)다. ‘빚을 면제해 준다’라는 뜻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빚에서 해방해주는 일종의 선물이다. 용서의 힘은 크다. 앙숙인 나라도 손을 맞잡게 한다.


독일과 폴란드가 대표적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1939년 ‘독일인의 고유한 영토’ 탈환을 빌미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당시 폴란드인 600만명이 사망했다. 폴란드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달한다. 폴란드인의 눈에는 독일은 앙숙 그 이상의 대상이었다.


두 나라의 관계는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 게토 봉기 영웅 기념물’ 앞에서 헌화하다 갑자기 무릎을 꿇은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개선됐다. 독일 총리의 '무릎 사죄' 이면에는 용서의 서신이 있다. 1965년 공산 치하의 폴란드 주교단은 서독 주교단에 서신을 보냈다. 서신은 "(양 국민 간의) 끔찍한 과거 때문에 괴로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합시다. … 우리는 여러분을 용서하며 또한 여러분으로부터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 서신 한장은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고,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는 나치가 벌였던 전쟁과 잔혹 행위에 대한 독일인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폴란드에선 신동방 정책이 추진됐고, 훗날 서신은 ‘감동적인 화해 문서’, ‘화해의 아방가르드’로 평가됐다.


한국과 일본도 '용서'의 변곡점에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면서 일본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후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6일 일본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정신을 계승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98년 10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당시 김대중(1924~2009)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1937~2000) 일본 총리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오부치 총리의 ‘식민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가 명기됐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속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식민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최근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병 관련 기술의 강제성을 희석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키며 한일 관계에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기시다 총리가 에둘러 표현한 사과는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되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한일 군사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일본은 지구 곡면 때문에 북한 미사일이 일정 고도 이상 상승해야 탐지할 수 있다. 탐지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의 레이더 정보를 즉시 공유할 경우 일본 이지스함 레이더로 북한의 미사일 비행 정보를 빠르게 파악해 요격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또 일본은 북한 미사일이 날아올 때마다 해당 지역 주민에게 피난 경보인 ‘전국순시경보시스템’(J-ALERT)'을 발령하는데, 이 역시 더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


안보협력의 중요한 전제조건은 진정성이 있는 사과일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다시 오부치 선언문을 읽어보길 바란다.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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