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폴란드의 역사를 보라

최종수정 2022.10.14 11:10 기사입력 2022.10.14 11:10



[아시아경제 양낙규 군사전문기자]폴란드는 어떤 나라이기에 한국산 무기 3종 세트를 대량으로 구입했을까. 프레드릭 쇼팽(Frederic, Francois Chopin), 마리 퀴리 (Marie Curie),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등 역사에 남는 천재들을 배출한 부족함이 없는 국가처럼 느껴져 궁금증은 더 해졌다.


지난 7월 폴란드 방문 당시 맛을 본 첫 음식은 검은색 호밀빵이었다. 이 빵이 궁금증을 풀어줄 첫 단서였다. 폴란드인은 일가친척이 찾아올 때면 맛없고 딱딱한 호밀빵을 함께 나눠 먹는다. 나라를 잃은 채 살아가야 했던 조상들의 설움과 한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만큼 폴란드인에게는 설움과 한이 있었다.


폴란드는 슬라브 민족의 분파로 이뤄진 나라다. 폴란드 국가명은 폴레는 평원을 뜻하는 옛 슬라브어 폴리에(polie)에서 나왔다. 방문기간 중 평원이란 단어가 국가명에 들어간 이유를 알기에 충분했다. 산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외적의 침입을 막아줄 장애물 하나 없는 불행의 땅으로 변할만했다.


폴란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분명해진다. 폴란드는 19세기 유럽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1795년 강대국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해 나라가 세 갈래로 찢어졌다.


폴란드는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서야 국가로서의 지휘를 회복했다. 국호와 국가를 잃어버린 123년을 버텨 되찾아온 ‘고난 끝 행복’이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은 1939년 10월 폴란드 항구도시 그단스크를 공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독일이 폴란드를 진격하자 놀란 소련은 폴란드의 동쪽을 허물고 침입하기 시작했다. 불과 3주 만에 폴란드는 다시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나라를 찾은 지 20년 만에 또다시 나라를 잃었다.


반쪽은 나치 독일에 의해, 반쪽은 소련의 핍박 속에 살아야 했던 폴란드인들의 삶은 처절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소련에 의해 공산화가 된 폴란드인들의 신음은 끊이지 않았다.


역사 속 위인들의 삶도 폴란드의 역사와 함께한다. 프레드릭 쇼팽은 스무살이었던 1830년 고향 바르샤바를 떠났다. 나라 없는 서러움을 버티지 못했다. 쇼팽은 결국 죽어서 고향에 돌아왔다. 1867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마리 퀴리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 파리로 떠났다. 타지에서도 여성이라는 점과 나라 없는 이민자의 서러움은 눈물겨웠다. 그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과학용어에서도 묻어나온다. 그녀가 발견한 물질인 폴로늄은 조국 폴란드의 이름이다.


나치와 공산주의에 아픔을 겪은 폴란드는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공산권이 무너지자 미국의 편에 선 것이다. 하지만 국제정세는 만만치 않게 돌아갔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와 스펀지 역할을 하는 옆나라 벨라루스가 친러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공산주의 폭정(暴政)을 45년간이나 경험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폴란드의 역사는 비단 남 일이 안다. 우리 역사도 만만치 않다. 최근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면서 불안감은 더 커진다. K-방산을 도입한 폴란드의 절실함을 봤다면 우리도 전력 도입에 있어 정치적인 싸움보다는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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