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P 정산금 지급 약속 지켜야

최종수정 2022.09.26 15:38 기사입력 2020.09.27 05:33



[법무법인 신영 송기출 변호사]2006년 기동헬기를 자체개발하겠다는 목표로 진행된 한국형헬기(KHP)사업은 (주)한국항공우주산업(KAI), 국방과학연구소(ADD),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등 3대 개발주관기관을 중심으로 수많은 방산기업들의 참여로 진행됐다. 6년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수리온”이 개발됐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11번째 헬기개발국이 됨과 동시에 국산헬기로 자국의 영공을 지키는 나라가 됐다.


KHP사업 역시 다른 대형 무기체계 연구개발사업과 마찬가지로 사업비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방위사업청은 지난 2006년 5월 연구개발비의 20%를 개발 참여업체들이 부담하는 내용의 보상합의서(연구개발에 성공할 경우 정부가 양산단계에서 업체 개발투자비를 전액 보전해 주는 조건)를 체결해야 했다. 또 방위사업청은 연구개발비의 80%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급하기 위한 재원도 부족해 산업부(당시 지경부)의 출연금 예산의 지원을 받았다. 산업부 출연금 예산을 재원으로 체결하는 계약의 경우 산업부 요청으로 “협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지만 협약조건은 계약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대가성을 전제로 한 권리의무관계로 구성됐으며 협약대금의 정산 역시 계약과 전혀 동일한 절차와 원칙이 적용됐다. KHP계약 및 협약은 지난 2006년 6월 체결됐다.


이후 KHP연구개발 진행과정에서 중간정산 등을 통해 각 계약과 협약 관련해 상당한 초과 정산금 발생이 확실하자 방위사업청은 KHP협약의 초과 정산금 지급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추가 자금은 확보하지 못했다. 2012년 6월 개발이 완료된 후 KHP계약 및 협약에 대한 사후원가정산이 동시에 이뤄졌다.


방위사업청 원가부서는 엄격한 원가검증을 통해 KHP 각 계약 및 협약별로 초과 정산금의 발생을 확인하고 사후원가 정산결과를 방위사업청장에게 보고했다. 물론 KHP사업단에도 통보했다. 그러나, 초과 정산금을 지급할 재원을 확보하지 못한 방위사업청 KHP사업단은 2012년 12월 협약상대자인 한국항공우주산업(이하 KAI)과 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에 대해 협약대금을 초과하는 정산금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최종 통보했다.


이에 KAI와 항우연은 수백억원에 달하는 초과 정산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각 제기했고 하급심 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그러나 선행사건인 KAI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출연금 예산을 재원으로 체결된 협약은 공법관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원심을 취소하고 사건을 서울행정법원을 이송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이후 사건을 이송받은 서울행정법원은 KHP협약이 공법상 계약이라는 점을 앞세워 민사소송 재판부와 달리 KAI와 항우연의 청구를 기각했다. 현재 KAI협약 사건은 대법원에, 항우연협약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에 현재 진행중이다.


최근 초과정산금 소송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수치심이 들었다. 정부가 연구개발에 참여한 업체들에게 실발생비용을 보전해 주겠다는 분명한 약속했고 정부의 엄격한 원가검증을 통해 초과비용 발생했음에도 초과비용의 지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가려내야 한다.


2009년과 2012년에 이어 2013년까지 방위사업청 항공기사업 담당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KHP정산과정 등에 대해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참기 힘든 불편함과 죄책감이 밀려 든다. 방위사업청 법무실은 2006년 KHP계약 및 협약 체결 시점부터 2012년도 정산이 이루어질 때까지 단 한번도 KHP협약은 공법관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거나 사후정산을 통해 확인된 KHP협약의 초과정산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률 판단이나 조언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방위사업청 법무실은 KHP계약이건 협약이건 철저한 대가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권리의무관계도 그에 따라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만을 일관되게 논의한 것으로 기억한다. 관련 소송이 제기되자 소송 대응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공법관계에 해당하므로 달리 봐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2012년 정산 당시 방위사업청 업무관계자들은 초과 정산금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지급재원을 확보하지 못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초과 정산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KHP협약 소송과정에서 2006년 KHP사업단에서 한국항공, 항우연을 비롯한 개발업체들과의 의사합치 하에 KHP계약 및 협약 조건을 직접 만든 업무담당자들은 물론 2006년 협약 체결시 항공기계약팀에서 협약체결업무를 수행했다. 2012년에는 원가분석팀에서 KHP정산의 원칙과 기준을 정해 ADD, 항우연 및 개발업체들에 알려주었던 핵심업무담당자 3명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증언했다.


3명 모두 ‘KHP협약 역시 계약과 동일하게 사후 원가정산된 결과에 따라 초과 정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것이 맞다’고 일관되게 진술한 것이다. 물론 이는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도 일치한다. 공무원이었거나 현재 공무원인 사람들이 정부의 입장에 반대되는 증언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기를 바라는 용기를 내어 진실을 이야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KHP협약 당사자 사이에는 방산원가를 적용한 사후정산결과(실발생비용 정산의 의미)에 따라 KHP협약 대금을 확정한다는 의사합치가 있었다는 사실은 각종 보고공문과 회의록, 중간정산 결과 등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또한 ‘사업단의 승인분에 한한다’는 협약조항 문구는 사업단의 승인 하에 진행된 연구개발에 한해 정산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실제 KHP계약은 물론 다른 무기체계 연구개발계약에도 동일 또는 유사한 취지의 문구가 적시됐다.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공법상 계약의 계약상대방인 기업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공법상 계약이라고 해서 기업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근거는 없다. 공법상 계약과 관련해서는 간과되어서는 안될 원칙과 기준이 있다.


첫째, 공법상 계약에 있어서도 강행법규에 반하지 않는 한 당사자간 의사합치 내용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 공법상 계약 역시 계약인 관계로 당사자간 의사합치된 내용으로 권리의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공법관계라는 이유만으로 의사합치가 되지 않은 내용을 업체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공법상 계약은 불공정한 계약의 표상이 될 것이다.


둘째, 정부의 약속을 믿고 계약을 체결한 업체의 신뢰는 마땅히 보호돼야 한다. 그러한 신뢰가 보호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정부의 존립과 유지는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공법상 계약일수록 정부가 한 약속은 더더욱 지켜져야 하는 이유이다.


KHP협약 개발비에 대한 사법부의 정의로운 판단을 통해 공법상 계약의 원칙과 기준이 새롭게 정립되기를 소망해 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방산기업들이 정부를 믿고 무기체계 연구개발에 과감한 투자와 도전을 함으로써 자주국방을 실현하는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양낙규 군사전문기자 if@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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